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평가 (문단 편집) ==== [[바르바로사 작전]] ====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제1차 세계 대전|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근자감|근거없는 망상]]으로 월동장비 지급을 금지해서(뒤늦게나마 괴벨스가 수습하긴 하였지만) 1941년 12월 말의 시점에서 동상자가 10만 명 이상 발생. 단 이 역시 히틀러 혼자만의 실책이라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애당초 '''독일군 전체가 상황을 전혀 모른 채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11월 7일 오르샤에서의 회의에서 할더는 '최대', '최소' 두 개의 경계선이 그려진 지도를 준비해왔는데 '최소'는 말 그대로 육군이 틀림 없이 도달 가능한 지점을 의미했다. 이 최소 진출선이 '''모스크바 동쪽 260km'''를 통과하여 로스토프에서 끝난다. 이것만으로도 황당한데 최대경계선은 소련의 동쪽으로 120~150km를 더 전진해 볼로그다, 고르키 산업지대를 포함하고 남동쪽으로는 320km를 더 뻗어서 스탈린그라드 동쪽으로 50km를 넘어 마이코프 유전지대까지 이어졌다. 이것만으로는 할더가 낸 보고서이니 할더만 정신이 나갔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또 골 때리는 것은 동부전선 외국군 정보과는 11월 중순 소련이 '''200개 주요 부대를 보유했으나 그 부대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해 실질 전투력은 50% 이하'''라고 보고했다. 이 시점의 소련은 '''373개의 주요 부대를 보유하였으며''' 비교적 무장, 훈련 상태도 좋았던 극동 사단들까지 모조리 때려박고 있었다. 설령 이 시점의 일부 장교들은 더 이상의 전진이 힘들다는 정도는 깨달았을지언정 여전히 소련의 저력을 완전히 얕잡아 보고 있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이미 이 시점(41년 11월 10일)에서 전사, 부상, 실종을 전부 합쳐 장교 2만 2432명, 사병 66만 3676명에 달하였고 편제과에서는 136개 사단의 전투력이 83%까지 저하 되었다고 진단하였고 수송체계 역시 라스푸티차가 끝나자 몰아닥친 한파에 차량과 기관차도 피해를 입으며 도로가 얼어붙은 효과가 상쇄되어 버린 판국이었다. 당연히 동계장비 지급이 쉽지도 않았는데 --묻고 따블로 가-- 여기서 모스크바 공격을 결정했으므로 동계장비 대신 공세를 위한 보급품이 우선적으로 지급된 것은 당연한 일. 후세 사람들이 보기엔 이 시점의 독일군이 부정확한 정보에 의존해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기꺼이 도박에 나서는 소름끼칠 정도의 적극성을 이야기하지만 이 시점의 독일군은 '''그것이 도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15, 16일에 시작한 공세는 돈좌 되었고 11월 27일에 바그너는 "인적, 물적으로 능력의 한계에 도달하였고 소련군이 무너질 것이란 예측은 허구이므로 모스크바를 포위할 능력이 없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지 결정할 때"라고 보고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공격을 지속했고''' 12월 4일 아침 소련군은 완벽한 기습으로 독일군에 반격을 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